안녕하십니까. 저는 현재 대전에서 대학원 공부를 하고 있는 환우입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이렇게 지면으로나마 여러 환우, 가족 분들께 저의 이야기를 들려드릴 수 있게 되어서 기쁘게

생각합니다. 얼마 안 되는 저의 경험들이 부디 건강을 관리하시는 데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는 올해 초 카이스트 대학원에 들어갔는데, 지난 3월말 오른쪽 발목에 관절경 수술을 받게 되어 지금은

휴학중에 있습니다. 현재는 매일 아침 혈우재단의원과 서울 쉼터(코헴의집)을 오가며 재활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아침이면 물리치료를 받고 저녁에는 쉼터에서 다른 환우분들과 저녁을 먹는 반복적인 날들이지만 많은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저는 부산에서 태어났습니다. 혈우병은 3살 때 진단 받았습니다. 3살 때 아파트 1층에 설치되어 있는

철제 우편함에 손을 넣다가 그만 손가락을 베어 피가 난 일이 있었습니다. 그리 크지 않은 출혈이라 금세 멈출

법도 한데 지혈이 되지 않았습니다. 저는 부모님과 함께 가까운 개인병원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도 피가 멈추지

않았습니다. 병원에서는 종합병원에 가볼 것을 권했고, 그렇게 찾아간 인제대 부산백병원에서 혈우병A 중증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렸을 때 코피를 자주 흘리고, 발목도 잘 삐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불과 20여년 전 일이지만, 당시만 해도 유지요법이라든지, 자가주사의 개념이 그리 흔치 않았습니다.

출혈이 발생하면 그때그때마다 병원을 찾는 식이었습니다. 저도 친구들과 놀다가 출혈이 나면 부랴부랴 차를

타고 백병원에 달려가서 응고인자를 맞았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매일같이 집에서 40~50분 되는

거리를 왔다갔다 하기란 매우 힘든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처방받은 약을 싸들고 가까운 병원으로

찾아가 주사를 맞았습니다.

그러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어머니께서 주사교육을 듣고 오신 뒤로는 집에서 직접 주사를 맞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1~2일에 1회 정도 주사를 맞으며 유지요법을 시작했습니다. 생활에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규칙적으로 주사를 맞으니 전처럼 코피가 자주 나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보다 더 재미있게 놀고, 좋아하는

축구도 더 열심히 했습니다.

그런데 그게 화근이었습니다. 제 인생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게 축구입니다. 저는 그만큼 축구를 좋아합

니다. 그리고 말하기 부끄럽지만, 어렸을 때부터 축구를 매우 열심히 했습니다. 부모님께서 “축구하면 안 된다”,

“그렇게 계속 공차고 놀다가 언젠가는 수술할지도 모른다”며 경고하셨지만, 도저히 축구를 포기할 수 없었습니

다. 그리고 정말 그 말처럼 저는 축구를 하다가 지금까지 총 3번이나(15살, 20살, 26살) 발목 수술을 받았습니다.

지금 돌이켜 보면 정말 후회가 됩니다. 혈우병 환우가 매일같이 축구를 하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지요.

하지만 그때는 그랬습니다. 발목은 점점 더 상해가는 것도 모르고 축구를 하면서 친구들과 함께 스트레스를

풀었습니다.

그런데 또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때는 축구가 저에게 위험한 운동이란 걸 몰랐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집에서

어머니께서 워낙 관리를 잘해주셨던 터라 유지요법을 시작한 후로는 별다른 출혈이나 통증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제부턴가 제가 ‘혈우병 환우라는 것’과, ‘혈우병이 철저히 관리를 해야만 하는 질환이라는 것’을 인식하

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한 마디로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자가주사를 시작하면서 혈우병에 대한 경각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집과 멀리 떨어진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자취를 시작한 저는, 이틀에 한 번 꼴로 학교 양호선생님을 찾아가 주사를 맞고는 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습니다. 양호선생님이 주사를 너무 못 놓는 것이었습니다. 주사바늘은 자꾸만 혈관을 피해갔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방에서 직접 팔을 찔러 가면서 주사를 연습했고, 몇 번의 시도 끝에 결국 자가주사에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조금 웃기지만, 어쨌든 자가주사를 할 수 있게 되니 생활이 매우 편해졌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출혈도, 통증도 없으니 그야말로 축구를 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날들이 찾아온 것이었습니다.

아, 이렇게 말하면 제가 공부는 안 하고 축구만 한 것으로 오해하실 것 같은데, 공부도 열심히 했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공부 욕심이 많았습니다. 딱히 좋아하는 과목은 없었지만 책을 많이 읽었고, 중학생이

되고나서는 경쟁심도 많아졌고 수학과 과학에 소질을 보여 과학고에 들어갔습니다. 솔직히 그때만 해도 제가

공부를 좀 잘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과학고에 들어가 보니 그것이 제 착각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과학고는 소위 ‘공부 좀 한다’ 하는

친구들은 다 모인 곳이었고, 저는 첫 시험에서 80명 중에 60등이라는 실망스러운 성적표를 받았습니다. 열등감과

스트레스가 치솟았습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공부하는 데만 썼습니다.

그러면서 답답할 때면 저녁 먹고 딱 30분 정도만 축구를 하며 스트레스를 해소했습니다.

저는 지난 3월에 받은 수술이 저의 3번째 수술입니다. 모두 축구라는, 거친 운동을 한 대가로 받은 수술이기에

이번 수수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 많습니다. 가장 먼저는 ‘유지요법이 결코 다가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유지요법은 기본 중에 기본입니다. 저는 3일에 1번, 일주일에 총 2번 정도 유지요법을 했는데 그게 조금 후회스럽

습니다. 물론 개개인의 상태를 고려해야겠지만 일반적으로 하루에 1번 또는 이틀에 1번 꼴로는 주사를 맞는 게

좋은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어린 환우들, 특히 중고생 남자환우들은 유지요법만 하면 ‘거친 운동을 해도 괜찮겠지’

라는 착각을 하기 쉬운데, 그러다 정말 큰일납니다. 유지요법을 하든 안 하든 관절에 무리가 가는 운동은 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물론 운동을 좋아하는 남자들은 성격상 누가 하지 말라고 해도 결국은 운동을 할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좋은 방법은 거친 운동 대신 다른 운동을 찾아보는 것입니다. 저 같은 경우는 이제 축구를 떠나

가끔씩 탁구를 치는데, 훨씬 무리도 적고 스트레스 해소도 잘 되어 좋은 것 같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중고생 환우를 둔 부모님들께서도 아셨으면 좋겠습니다. 무작정 거친 운동을 하지 말라고 하시기

보다는 대안이 될 수 있는 운동을 권해보시는 게 더 좋을 것입니다. 또한 유지요법과 자가주사는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늦어도 아이가 초등학교 고학년부터는 자가주사를 할 수 있도록 교육하시는 게 아이와 부모님 모두를

위해 좋을 것입니다.

끝으로 진학과 진로에 대한 고민을 안고 있는 또래, 후배 환우분들께 말씀드리며 글을 맺겠습니다.

취업이 어렵습니다. 저 또한 늘 진로에 대해 고민합니다. 그런데, 이는 개인의 문제가 아닌 사회 구조적인

문제라서 어느 정도의 시간과 변화가 필요합니다. 어렵고 힘들다는 이유로 안정적인 직업과 시험에만 몰두하지

말고 철저한 준비와 전략을 갖고 자신의 미래에 도전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유지요법이 필수입니다. 유지요법을 성실하게 하여 건강하게 꿈을 이뤄가는 저와 환우 여러분들

되셨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