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호 님

안녕하세요. 저는 GC녹십자의 R&D 전략팀에서 일하고 있는 황성호입니다. 10여년 전에 코헴지에 몇 번 기고한 적이 있었는데, 오랜만에 인사드리는 것 같습니다.

이번 주제는 46년 간의 저의 혈우병 치료의 경험을 공유하고 이를 바탕으로 보다 건강한 중장년 생활을 바라는 마음으로 작성하였습니다. 저는 혈액응고인자 중 9인자가 부족한 혈우병 B 환우입니다. 어린 시절을 회고하며 젊은 환우와 부모님들에게 도움이 되길 바라며, 저의 경험을 공유하겠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1년에 3~4번 정도 관절 출혈을 경험했던 것 같습니다. 주로 오른쪽 무릎과 양쪽 발목이 출혈의 타겟이었습니다. 별다른 치료법은 없었고 주로 ‘파스’와 바르는 소염진통제 그리고 진통제를 이용하였습니다. 약 30여일 정도 지나면 일상으로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담담히 적고 있지만 상당히 많이 아팠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친구의 생일 파티에서 신나게 놀다가 인생의 전환점이 될 출혈이 오른쪽 종아리에 발생했고 약 40일간 누워있었던 기억이 납니다. 이때 셜록 홈즈의 소설 전집을 읽은 경험이 지금도 뭔가 분석하고 통찰력을 발휘하는데 영향을 준 것 같습니다. 전집을 다 읽고 나니 너무 심심해서 그 당시 유행했던 주간 학습지를 풀었습니다. 그리고 40여 일만에 학교에 갔더니 갑자기 시험을 본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채점 결과를 보고 선생님이 놀라서 “학교 나온 애들 보다 시험을 더 잘 봤다”고 하셔서 뿌듯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작은 불씨가 되어 공부하는 것에 동기 부여가 되었고, 육체적으로 한계에 직면하고 저만의 길을 찾은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지금 돌아보니, 매 출혈의 순간들은 통증을 동반하지만, 그 안에서 가치를 찾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큰 통증과 마음의 상처,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 같은 두려움과 후회. 하지만 우리는 다시 몸도 회복되고 다시 일어났으며 다시 꿈꾸게 됩니다. 이러한 반복이 우리 혈우인들의 삶이 아닐까 합니다.

중학교 시절

앞서 기술한 오른쪽 종아리 근육의 출혈이 이후의 삶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이벤트가 되었습니다. 이때의 출혈 자체는 관절에 큰 영향을 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별다른 치료와 재활 방법을 몰랐기에 그냥 방치해두고 나아지길 기다렸죠. 하지만 편안한 상태로 두다 보니 종아리 근육은 섬유화 되었고, 이완(근육이 늘어나는 과정)이 되지 않았습니다. 까치발이라고 불리는 첨족 상태로 걷다 보니 오른쪽 무릎의 출혈 빈도가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출혈 사건이 중학교 2학년의 수학여행 때였습니다. 이때도 전 혈우병 치료제를 접하기 전이었습니다. 어떤 용기였는지는 모르지만 2박 3일간 경주로 수학여행을 떠났고 첫날밤이 지나고 무릎 출혈이 발생했습니다. 놀랍게도 이때 담임선생님을 포함한 선생님들은 아파도 함께 해보자는 이야기를 해주셨고, 저 또한 도전해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결국 선생님들과 덩치가 좀 컸던 친구들이 저를 번갈아 업고 경주의 여행지들을 돌아 다녔고, 많은 경험과 강렬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내가 무엇인가 정말 하고자 하면 주변에 나를 도울 사람은 있다. 나의 의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돌아와서 또 수십 일을 결석하게 되었지만 훗날 제 삶을 바꿀 소중하고 중요한 경험이었던 것 같습니다.

드디어 혈우병을 치료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떤 경로인지 모르지만 어머니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90년대 초에 연세 세브란스 어린이 병원에서 물리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때는 노란 혈장 팩을 이용한 치료였죠. 혈우병 신약을 연구하고 있는 저로서도 엄청난 격세지감을 느낍니다. 훗날 불행하게도 이때 노출된 혈장으로 C형 간염에 감염되었죠.

세브란스 어린이 병원에서의 한 달 간의 입원치료도 제 삶에 중요한 변곡점이었습니다. 제 주변에서는 제가 제일 아픈 사람이었는데, 그 병원에서는 제가 제일 정상에 가까웠습니다. 희귀 대사 질환으로 정신박약, 지체 장애, 신경발달 지연을 앓고 있던 제 옆 병상의 친구도 기억나고, 유치원 화재로 전신에 화상을 입어 피부가 심각하게 손상된 친구, 원인 불명의 장애를 앓고 있는 친구들 그리고 어머니들의 대화가 생각납니다. “한국에서는 치료약이 없지만 미국에 가면 약이 있다고 하는데”하며 눈물 흘리시던 어머니들이 생각나네요.

이때 저는 나보다 더 힘들고 고난에 처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이후로 제 질병이나 제 환경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이때 어머니는 ‘고리회’라는 혈우병 환우모임에 가입하신 것 같고 92년도에 혈우재단에 254번으로 등록해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첫 응고인자제제 주사를 맞고 저는 충격에 빠졌습니다. 출혈이 발생한 다음날 아프지 않다니! 이것은 정말 신세계였습니다. 그동안 출혈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이 제 주된 감정이었고, 제 잠재의식을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것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과도한 해석이라는 사실을 마흔이 넘어서 알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잘못을 막기 위해 젊은 혈우인들에게 해줄 수 있는 충고는 출혈을 걱정하거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지만, 끊임없이 관리하고 교육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새롭게 밝혀지는 많은 의학적 정보와 진보에 대해 학습해야만 건강한 중장년을 영위할 수 있음을 기억해 주세요(기회가 되면 후속 기고를 통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대학교 시절

특별히 기억에 남을 출혈 기억은 없이 출혈 후 치료법을 시행한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을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고향을 떠나 수원이라는 낯선 공간에서 자취 생활을 하게 되었죠. 중‧고등 학교 때는 출혈이 있으면 부모님과 함께 병원에 가서 주사를 맞았지만, 갓 성인이 된 제 독립생활은 순탄치 않았습니다. 자가 주사교육을 받았으나 자가 주사는 늘 자신과의 싸움이었습니다. 한 번에 주사를 성공한 경우는 드물었고 2~3번을 찔러야 했습니다. 찌르고 들어갔지만 혈관까지 덜 들어가거나 빗겨 나가거나, 살짝 뺐다 다시 넣는 과정…. 지금 생각해도 온몸에 땀이 흐릅니다. 심지어 주사약을 혼합해두고 포기한 적도 있었죠.

결국 1학기 기말고사 기간에 문제가 생겼죠. 오른 무릎의 출혈이 생겼고, 급히 자취방으로 돌아와 주사를 준비하였지만 실패하였습니다. 무릎은 점점 부어오르고 통증은 심해졌죠. 결국 제가 걱정되어 방문한 후배를 통해 어머니께 연락하여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결국 휴학하고 경희대 병원에 입원하여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오른쪽 종아리 근육의 섬유화 영역을 늘려주는 수술을 하게 되었습니다.

∎교훈: 정맥 주사하는 방법은 충분히 교육 받아야 하며, 피하 주사약물이 대세가 되더라도 배워둬야 합니다. 나를 지킬 수 있는 사람은 나뿐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적절한 치료시기를 한번이라도 놓치게 된다면 우리의 관절은 생각보다 빠르게 나빠진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수술과 재활을 하고 복학을 하였습니다. 뭔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성격 탓에 흑백 사진 동아리에 가입해 2학년 때는 집행부를 맡게 되었고, 3박 4일의 지리산 종주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250 유닛으로 2회분을 배낭에 넣으니 다른 물건을 넣을 자리가 부족하였지만, 꾸역꾸역 짐을 쌌던 기억이 나네요. 출발 전과 3일차에 미리 주사를 해서 별다른 출혈은 없었지만 빗속의 3박 4일의 종주는 정말 힘들었습니다. 그 후로 산을 가지 않습니다. 여행을 위한 짐을 쌀 때는 고용량의 약물을 준비하는 것이 좋습니다. 적절한 예방요법은 온전한 여행을 경험할 수 있게 만들어 줍니다.

대학원 시절

혈우병은 저에게 언제나 궁금증의 영역이며 회피의 영역이었던 것 같습니다. 왜 아픈지 궁금하긴 했지만 깊이 알아봐야 속상하고 좌절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첫 연구의 주제는 듀센형 근육병이었습니다. 우리 근육의 주요 구성 성분인 ‘디스트로핀’이 결핍되어 근육 운동 기능이 소실되어 죽음에 이르는 질병입니다. 지금은 많은 치료 가능방법이 있지만 20년 전에는 발병 기전과 작용기전에 대한 연구가 대부분이었죠. 그 당시 기술로는 치료법이 없었죠. 많이 좌절했던 연구 주제였습니다.

그러다 2006년 밴쿠버에서 개최된 세계혈우연맹 총회에 참석할 참가단을 모집한다는 공고문을 보고 지원하여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이때 혈우병 연구와 치료제 개발 동향을 보며 듀센 근육병 연구에서 좌절했던 연구의 불꽃을 되살릴 수 있었습니다. 총회에서 돌아와 국책 과제에 지원하여 혈우병연구를 본격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첫 번째 연구주제가 한국인 혈우병 환자의 유전자형 분석입니다. 이를 위해 많은 환우분들과 어머님들의 도움이 있었습니다. 이때 중학교 2학년 때의 수학여행 경험이 다시 살아난 것 같습니다. “내가 무엇인가 정말 하고자 하면 주변에 나를 도울 사람은 있다. 나의 의지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가 스탠포드 졸업 축사에서 했던 ‘Connecting dots’처럼 삶의 흔적들은 연결된다는 말이 떠오르네요. 지금 우리가 힘들고 어려운 시기라도 이것은 훗날 나의 인생에 중요한 변곡점과 연결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두 힘내세요!